본문 바로가기

펜 끝을 벼리다/머뭇거림보다는

내가 만난 ‘세월호 파란바지 아저씨’

3월 21일 페북과 트위터에 올렸던 글로 기사에 대한 소회를 갈음한다.


"어제 오전 내내 쓸까말까 고민했다. 김동수씨가 자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가뜩이나 민감한 일로 그러는 게 본인에게 더 좋지 않을 듯했다. 생명엔 지장없고, 안산으로 떠난다는 그의 소식에 생각을 정리했다.


세월호는 사고였으나 사건이 되어버렸다. 무능들이 겹겹이 쌓여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살아남은 자들도 희생자 중 하나일 뿐이다. 앞으로의 날이 그들에겐 형벌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들이 자꾸 '살아온 죄'를 말하는 이유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혹은 당신이 무슨 잘못이냐고 할 수는 있다. 딱 거기까지다. 타인의 말은 실제하는 고통을 없애주지 못한다. 김동수씨에게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리라.


사실 나는 무기력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건 이런 일이겠지. 곧 1주기다. 선원들과 청해진해운, 해경의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고 유족들은 여전히 거리에, 생존자들은 세월호 안에 있다. 우리는 이 비극을 어떻게 끝맺을 것인가."


=======================================


[取중眞담] ‘살아온 죄’ 자책하는 생존자들... 세상은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지난 10일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들의 항소심 3차 공판을 취재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라 고속버스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이내 잠에서 깨어버렸다. 뚜렷한 형상도, 줄거리도 없는 짧은 꿈이었지만 찝찝했다. 꿈에서 본 것은 분명 세월호 희생자였기 때문이었다.


당혹스러웠다. 선원들의 1심 공판 보러 다닐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다. 감각은 힘이 셌다. 생존자의 증언이나 현장 동영상, 사진 등 법정에 나오는 자료들을 눈과 귀로 접하며 수시로 2014년 4월 16일을 거듭 복기하는 상황은 예상보다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참사 관련 이미지가 꿈속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한동안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파란바지 아저씨’ 김동수씨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19일,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 경험이었다. 이날 그는 제주도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려고 했다. 김씨의 딸은 의식을 잃고 화장실에 쓰려져있던 그를 발견한 뒤 병원으로 옮겼다. 상태가 나아진 김씨는 20일 세월호 피해자들을 돕는 경기도 안산시 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로 떠났다.


‘그날 그 배’의 영웅은 스스로 죄인이라 말했다


2014년 4월 16일 침몰한 세월호 주변에서 수색작업이 진행 중인 모습. ⓒ해양경찰청


그의 고통이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사진과 증언 등으로 참사를 간접 체험했을 뿐인 나와 달리 김씨는 ‘그날 그 배’에서 살아 돌아왔다.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울어진 세월호의 3~4층 갑판을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배가 완전히 뒤집히던 때까지 다른 승객들을 도왔다. 그럼에도 김씨는 괴로워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 채 살아 돌아온 죄인이라며.


참사 당일부터 1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김씨는 늘 자책하고 있다. 지난해 5월 13일, 제주도의 한 병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부터 변함없었다. 1시간 가까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김씨는 해경의 무능을 질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중간 중간 목소리가 잦아지던 순간이 있었다. ‘죄책감’을 털어놓을 때였다. 김씨는 참사 당일 기억에 드문드문 빈 곳이 존재한다고, 죄책감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관련 기사 : "해경은 살릴 마음이 없었다").


“(구조된 다음) 진도체육관에 가보니까 부모들이 와서 통곡하는데… 살아온 게 죄인이라고… 그때 그 감정은 아무도 모른다. 지금도 그 죄책감에… (4월 16일) 오후 7시 넘어서 체육관에서 나왔다. 미안하니까 우리(화물기사들)는 광주라도 보내달라고. 빨리 제주도로 가야겠다고. 학생들은 계속 시신으로 올라오고, 학부모들은 계속 울고, 찾고 난리인데 (우리가) 어떻게 계속 거기 있을 수 있겠나.”


끝내 구조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거듭 미안해하던 그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말이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너무 괴로워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병실을 나선 게 전부였다. 


그와 가족의 생계수단인 4.5톤짜리 화물트럭도 세월호와 함께 검푸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3개월 정도 나오는 정부의 생활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김씨는 세월호를 잊지 않았다. 자신을 줄곧 괴롭히고 있는 죄책감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2014년 10월 21일 세월호 선원들의 1심 28차 공판에서 여전히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다(관련 기사 : "아침마다 바다에서 학생들 헛것을 봅니다"). 


“어제 자살을 하려고 했다. 한라산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힘들다. 아침마다 바다에 나가 학생들 헛것을 본다. …(중략)… 해경이 저한테 와서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선장이 살인자죠?" 이랬다. 선장이 살인자면, 해경도 살인자다. 나도 살인자다.”


4월 16일 세월호에 갇힌 채 버티고 있는 사람들


지난 3월 17일 오전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 세월호 인양촉구 대국민 호소 기자회견. ⓒ 유성호

2월 1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그와 마주쳤다. ‘부실구조’ 책임으로 기소된 해경 123정 김경일 정장의 1심 선고 공판이 끝난 직후였다. 마른 편이지만, 오랜 마라톤 경력으로 다부진 느낌을 줬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누가 봐도 김씨는 수척한 모습이었다. 얼굴빛도 눈에 띄게 나빠져 있었다. ‘얼굴이 안 좋다,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에 김씨는 “그냥 뭐…”라며 멋쩍어했다. 그의 휴대전화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잊지 말자는 노란 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3월 20일 그는 왼쪽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비행기를 탔다. 제주공항으로 찾아온 취재진에게 김씨는 호소했다. “살아남은 우리에겐 무엇 하나 해결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은 다 끊긴데다 마음 놓고 치료받기도 어렵다며 국가는 생색만 내고 있다고 했다. ‘왜 세월호를 못 잊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도 정말 괴롭다고 털어놨다. 


“지나가는 학생들이나 창문만 봐도 안에 갇혀 있던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너무들 쉽게 잊으라고만 한다.” 


살아남은 자들마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에 갇힌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고, 어렵게 꾸려진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는 출범조차 못했다. 희생자 9명은 아직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진도 앞바다에 남겨져 있는 상태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은 도처에서 나오고 있다. 참사 1주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2015. 3. 2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91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