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영향받은 것이 무엇인가요?"
뻔한 질문, 그래서 뻔하게 답할 수밖에 없어 피하고 싶었던 질문을 받았다. 순간 아빠가 생각났다. 고집스럽고 욱하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사람, 99번 좋다가 단 1번 때문에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던 아버지였다. 그래도 '99번'때문에 실망과 미움이 사라지던 날이 많았다.
천안 공원묘지에 할머니를 모시던 날, 그날도 어김없이 '1번의 실망과 99번의 감동'은 반복됐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점점 더 커져가는 아버지의 목소리, 웃음이 참 싫었다. 짜증이 났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불그락한 얼굴, 풀어져버린 눈동자는 신기하게도 하관절차가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절차를 잘 모르는 탓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부들이 하관작업이 잘못 됐고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웃옷을 벗고 구덩이로 성큼 뛰어들었다. 11월 초였지만 바람은 거셌고, 땅은 차가웠다. 그 차가운 흙을 아버지는 맨손으로 퍼나르고, 파헤쳤다. 상복이 흙범벅이 됐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대로 슬픔을 표현하고,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이해할 수 없던 행동들을 조금씩 다시 보게 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의 방식을 알게 된 것 같다. 장지에 본 모습도 그랬다. 술주정이든, 뭐든 간에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의 방식대로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있었다.
내 방식은 단순했다. 그냥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것.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있어도 추억은 거의 없다. 2~3년 모시고 살기도 했지만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집에서 생활했기에 엄마아빠 몰래 밤늦게 드라마를 보려 할 때말고는 할머니 방에서 잔 적이 거의 없다. 질투도, 아쉬움도 없었지만 '예쁘고 귀여운 손녀'라기보다 '수많은 손자들 중 하나'임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의 늙음, 쇠약해진 몸을 보면서도 별 다른 감흥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몇 달 전 병상에서 본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8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를 알고 있었지만, 올 초까지만 해도 당신이 손수 담근 식혜며 김치를 빠짐없이 내놓으시던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늙음'이란 단어의 인상 그 자체로 있었다. 작고, 약하며 세상에 방치된 것 같은 몸뚱아리로. 매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참빗으로 빗어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렸던 머리는 부시시했다. 얼마 뒤 엄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고 전했다. 내 생애 통틀어, 그녀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연상되던 이미지는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지난주,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 할머니를 찾았을 때 산소호흡기에 의지에 가쁜 숨을 내쉬던 내 할머니는, 아버지의 어머니는, 잇몸 사이로 새어나오는 발음 탓에 좀처럼 알아 들을 수 없던 그녀의 이야기는, 밥 먹고 오라는 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리사랑'이라는 참, 뻔한 말이 그토록 질기고 오랜 생명을 유지하는 건 뻔하게 느껴지는 만큼 늘 반복되는 일이어서 그런가보다. 그리고 그 말은 할머니가 내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됐다.//
더 이상 글이 나가지 않는다.
그냥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록을.
그게 전부다.
뻔한 질문, 그래서 뻔하게 답할 수밖에 없어 피하고 싶었던 질문을 받았다. 순간 아빠가 생각났다. 고집스럽고 욱하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사람, 99번 좋다가 단 1번 때문에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던 아버지였다. 그래도 '99번'때문에 실망과 미움이 사라지던 날이 많았다.
천안 공원묘지에 할머니를 모시던 날, 그날도 어김없이 '1번의 실망과 99번의 감동'은 반복됐다. 거나하게 술에 취해 점점 더 커져가는 아버지의 목소리, 웃음이 참 싫었다. 짜증이 났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불그락한 얼굴, 풀어져버린 눈동자는 신기하게도 하관절차가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절차를 잘 모르는 탓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부들이 하관작업이 잘못 됐고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웃옷을 벗고 구덩이로 성큼 뛰어들었다. 11월 초였지만 바람은 거셌고, 땅은 차가웠다. 그 차가운 흙을 아버지는 맨손으로 퍼나르고, 파헤쳤다. 상복이 흙범벅이 됐다.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대로 슬픔을 표현하고,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이해할 수 없던 행동들을 조금씩 다시 보게 되면서부터, 나는 아버지의 방식을 알게 된 것 같다. 장지에 본 모습도 그랬다. 술주정이든, 뭐든 간에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의 방식대로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있었다.
내 방식은 단순했다. 그냥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것.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있어도 추억은 거의 없다. 2~3년 모시고 살기도 했지만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집에서 생활했기에 엄마아빠 몰래 밤늦게 드라마를 보려 할 때말고는 할머니 방에서 잔 적이 거의 없다. 질투도, 아쉬움도 없었지만 '예쁘고 귀여운 손녀'라기보다 '수많은 손자들 중 하나'임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의 늙음, 쇠약해진 몸을 보면서도 별 다른 감흥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몇 달 전 병상에서 본 할머니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8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를 알고 있었지만, 올 초까지만 해도 당신이 손수 담근 식혜며 김치를 빠짐없이 내놓으시던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늙음'이란 단어의 인상 그 자체로 있었다. 작고, 약하며 세상에 방치된 것 같은 몸뚱아리로. 매일 새벽이면 어김없이 참빗으로 빗어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렸던 머리는 부시시했다. 얼마 뒤 엄마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고 전했다. 내 생애 통틀어, 그녀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연상되던 이미지는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지난주,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채 할머니를 찾았을 때 산소호흡기에 의지에 가쁜 숨을 내쉬던 내 할머니는, 아버지의 어머니는, 잇몸 사이로 새어나오는 발음 탓에 좀처럼 알아 들을 수 없던 그녀의 이야기는, 밥 먹고 오라는 것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내리사랑'이라는 참, 뻔한 말이 그토록 질기고 오랜 생명을 유지하는 건 뻔하게 느껴지는 만큼 늘 반복되는 일이어서 그런가보다. 그리고 그 말은 할머니가 내게 남긴 마지막 한 마디가 됐다.//
더 이상 글이 나가지 않는다.
그냥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기록을.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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