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끝자락을 붙잡고 연남동의 한 포차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딸랑 소리에 문이 열리더니 웬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늘상 보는 껌팔이 할머니인 줄 알았다.
평소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의외의 품목을 꺼내셨다. 꿀이었다.
껌이 아니면 모시송편이나 초콜릿정도겠지 싶었는데, 전혀 상상 못한 물건이었다. 할머니는 "제주미깡에서 모은 것"이라며 내게 "비바리한테 좋다, 비타민씨도 많고..."라고 말하셨다. 지난주 시부모님과 찾아뵌 일산 외할머님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차마 평소처럼 어색하게 "죄송합니다"하고 꾸벅 끝내기 어렵더라. 결국 나는 택시비로 받은 공돈을 털어 꿀을 샀다, 설탕물에 가까워보이는.
예상했던 결과였다. 집에 있는 꿀과 나란히 세워두니 두 통은 확연하게 달랐다. 왼쪽이 연남동 제주할망께 구입한 것이고, 오른쪽이 원래 보관 중이던 꿀이다.
두번째 꿀은 몇 달 전 시댁에서 보내주셨다. 과수원에서 일하시는 큰아버님이 시험삼아 벌통을 두셨는데, 생각외로 꿀이 잔뜩 모였다고. 설탕 하나 먹이지 않고, 정말이지 '부지런한 꿀벌'들이 만든 '부지런한 벌꿀'이었다. 냉장보관을 해서 좀 하얗게 굳었지만 점도나 맛과 향이 동O벌꿀이니 하는 시종 상품들과 크게 차이난다. 반면 연남동 꿀은... 요리당에 가까운 느낌이다. 처음 꿀통을 받았을 때도 살짝 당황스러웠고... 술자리 동료들에게 선물삼아 건넸지만 모두 나의 호의를 거절했다.
눈 한 번 딱 감아버리면 되긴 했다. 어차피 남이고, '괸당'도 아니니 말이다. 원래 착한 사람도 아니고, 돈 쓰기 보다는 아끼는 데에 더 익숙한 성격이니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꿀통을 주섬주섬 꺼내는 할머니 입에서 제주 방언이 나오자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결혼한 지 고작 1년 됐을 뿐인데, 제주도와 연관 있는 것들에 자꾸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인다. 결혼은 배우자와 그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가 자고 나란 고향땅과도 관계 맺는 일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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