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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몇 가지/조금만 더

과학을 망치는 한국의 과학사회학

슬로우 뉴스 '자본에 지배당한 과학계, 황우석은 필연이다(김우재편 上)' 중에서 http://goo.gl/rFphL

리 : 황우석이 참 과학계에 민폐를 끼쳤다. 이 문제의 근원을 어떻게 보는가?

초 : 황우석 개새끼로 보면 문제 해결이 안 된다. 결국, 이것도 자본에 과학이 종속되면서 생긴 일이라는 큰 틀에서 봐야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회가 과학을 서포트하고 집행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이 없다. 이런 상태니까 과학이 제대로 발전할 수도 없고, 사회가 활용할 수도 없다.


리 : 과학에 대한 문화적 역량이 어떻게 떨어진다는 건가?

초 : 서울대 과사철 협동과정(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이란 코스가 있다. 과학 주변의 인접 학문을 연구하는 건데, 이 사람들이 과학자들과 전혀 안 친하다. 여기 소속인 홍성욱 교수는 자연과학 소속 교수로, 기술사 전공이다. 그런데 연구비는 과학재단 같은 데서 받아가고, 과학자들에게 도움되는 얘기를 안 한다.


리 : 예를 들자면?

초 : 황우석 사태 때 이 사람들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황우석이 부정을 저질렀고 논문조작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모든 과학자가 매도당했다. 과학사회학계에서는 연구윤리위원회를 전 대학에 설치하자는 주장을 했다. 이건 자기 밥벌이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 연구윤리위원회 들어갈 건 자기들이니까.


리 : 과학사회학이 당연히 과학 비판해야지, 그럼 요리라도 가르치라는 건가?

초 : 과학사회학은 본디 비판적이고, 과학비판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애정은 필요하다. 막말로 진중권이 우리나라 비판하면서 “신발, 대한민국 망해라!” 식이면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근데 과학사회학자들이 과학 대하는 태도가 “과학 망해라!” 이런 식이다.


리 : 그렇다고 논문조작을 냅둘 수는 없지 않은가?

초 : 당연히 논문조작은 비판해야지.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해결책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과학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에서 자기들이 접근하기 쉬운 개인적이고 윤리적 문제에만 집중한다는 거다. 사회적, 구조적인 문제가 더 중요한 거잖아? 카이스트 학생이 자살하고, 과학자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방황하고, 오직 돈 되는 연구에만 몰두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지금 논문도 죄다 황우석 같은 논문조작, 연구윤리 이야기나 하고 있고…

이쪽 사람들을 보면 참여연대 출신을 비롯해 진보 개혁적이라 불리는 양반들이 많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내세우는 과학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개인으로 소급한다. 진보적이 아니라 굉장히 보수적인 스탠스다. ‘서민은 게으르니까 가난하다.’ 식의 논리다. 진보는 사회를 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칭 진보적이라는 과학사회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보이는 행태는 무모하리만큼 보수적이다. 게다가 신발… 자기가 과학에 들이대는 잣대를 자신의 학문에는 들이대지도 못한다. 예로 문대성 논문 표절로 국민대 난리 났는데, 한국 과학사회학계 대부 김환석은 국민대 소속 아닌가? 지 학교 제대로 관리 못하면서 무슨 과학계에 이래라 저래라야, 신발… 연구윤리위원회를 지가 하고 있을 텐데.


리 : 진정해라-_- …

초 : 사실 사람이 진보적이라 하고 근원적으로 학문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비판한다면 그 일이 일어나게 된 구조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하지 않겠나? 과학사회학자들이 과학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으면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공계에서 논문조작 생길 수밖에 없다. 왜? 대부분 포닥이나 대학원생이 된다. 교수는 실적이 급하니 포닥, 대학원생을 갈군다. 이런 쪼는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실험 조작이 일어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실험 안 되고 갈구고 이러면 애들은 거짓말 할 수밖에 없다. 교수는 애들이 갖고 와서 발표하는 것만 보니까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고.

이런 케이스는 봐줄 만 한 거고. 정말 야망에 부푼 애들도 있다. 처음부터 조작질하는 놈들도 많다. 황우석이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기는 했지만, 과학은 데이터를 걸러내는 자정 시스템이 있다. 그건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과학의 시스템적 특징이다. 재현 가능성은 과학을 특징짓는 것이기에 아무리 뻥을 치고 싶어도 큰 뻥을 못 친다. 황우석처럼 큰 뻥 치면 딴 사람이 해본다. 안 되면 바로 들통 나니까.


리 : 들통 나면 어떻게 되냐?

초 : 별일 없다.


리 : 야… -_-…

초 : 농담이고 당연히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좀 웃기는 게 네이처 사이언스에도 재현 안 되는 게 수십 %나 된다. 네이처 하나 내고 튀자는 생각인 거다. 일단 당장의 위기 모면하자는 거지. 모든 총체적 문제들이 경쟁, 자본주의가 과학에 도입되면서 생긴 거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통 과학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른다. 솔직히 인문학보다야 과학이 배가 부르긴 하다. 그래도 인문학의 위기는 이래저래 알려졌지만, 이과, 과학의 위기는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아서 아쉽다. 이걸 과학사회학이 해야 하는데 제대로 하지 않으니 내가 짜증 내는 거다.


리 : 해외의 과학사회학은 어떤가?

초 : 예를 들어 미국 과학사회학자들은 아까 언급한 박사 공장(The PhD factory)이라는 과학 아티클, 에세이를 썼다. 미국 과학사회학자들은 논문조작, 연구부정에 천착하지 않고 과학기술계의 구조적 문제를 바라본다. 어떻게 해야 과학이 건강하고 발전적으로 움직일지, 구조에 집중하며 고민한다. 이 에세이가 이야기하는 것도 과학계가 안고 있는 문제는 구조적 문제다. 포닥을 학교에서 공장처럼 찍어내고, 비정규직 문제를 발생시켜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리 : 그렇다면 한국은?

초 : 반면 한국의 과학사회학자들이 집착하는 문제들은 개인, 윤리적 연구부정, 논문조작… 이것만 터지면 벌떼처럼 달려든다. 실제 더 중요한 문제들, 과학자들의 삶을 결정하는 문제들을 무시한다. 석사학위 받은 사람들의 월급이 얼마인지, 어떤 처우에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석사학위 받고 연구원 하면 월 150이나 받나? 거기다 비정규직이니 불안하다. 절대 정규직 안 시켜준다. 한국 정부출연 연구소도 다 비정규직으로 운영된다. 이런 문제들이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판을 과학자들에게 벌려주고 이런 문제가 왜 생기는지를 함께 고민하는 게 해외의 과학사회학이다. 신발…


리 : 해외 과학사회학자들은 연구윤리에는 별 관심이 없나?

초 : 당연히 많다… 하지만 거기에 천착하지 않고, 실제 과학 속으로 파고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과학사회학을 시작한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도 과학자의 4가지 규범으로 CUDOS 규범(communism, universalism, disinterestedness, organized skepticism; 공유주의, 보편주의, 무사무욕, 조직화된 회의주의)을 내세우지 않았나? 그런데 이 양반은 과학자와 과학의 시스템을 인정하고 과학자의 실제 연구 환경을 연구했다. 그 결과로 이런 규범을 내세운 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과학사회학자들이 실제 과학과 따로 놀고 있으니, 제대로 된 비판이 나오기 어렵다.


리 : 실험실과 멀리 떨어져, 앉아서 연구하는 건 과학철학도 마찬가지라고 깐 적이 있는데?

초 : 이건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과학철학은 언젠가부터 현장의 과학에서 멀어져 혼자 막 나가고 있다는 것만 말해두겠다. 현장의 과학에 제한받지 않는 과학철학 같은 건 사기다. 과학철학은 과학을 고정되어 있는 바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과학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다. 실험실에 나가지도 않는 태도로는 과학이 뭔지 제대로 사유조차 할 수 없다.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라는 과학철학자는 실험실 과학자로 20년을 살았는데, 그의 책을 보면 과학에 대한 수준과 이해 자체가 다름을 알게 될 거다. 물론 한국에서 그렇게 공부하려는 사람은 없지만.


리 : 여담인데 황우석도 자기 논문이 조작인지 몰랐을 수도 있겠다?

초 : 글쎄… 내가 황우석이 아니니 알 길이 없지. 그래도 내가 대학원, 포닥 생활을 11년 넘게 해 본 사람으로서 추측을 해본다면 언론에서 발표하기 전까지도 몰랐을 거다. 지도교수가 이렇게 속는 경우는 꽤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언론에서 문제 있다고 해서 대학원생과 면담을 했다면, 논문지도 한 사람으로서 뻔히 알 수 있다. 조작이 뻔한데 그다음 황우석이 이걸 발뺌한 게 문제다.


리 : 그렇다면 반대의 긍정적 사례라도?

초 :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福岡伸一)의 최근 번역된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에도 미국에서 있었던 논문조작 사건이 나온다. 이걸 보면 황우석 사건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는데, 지도교수가 보여준 태도는 황우석과 완전히 다르다. 논문을 철회하고, 논문을 조작한 포닥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 과학은 재현가능성(reproducibility)이라는 검증 시스템이 있기에, 논문조작은 쉽게 검증할 수 있다. 사실 철학도 상식(common sense)이란 게 제한을 하는데, 요즘 인기를 끄는 인문학자는 그런 걸 무시하는 듯해서 아쉽다.


리 : 최근 이화여대에서 한 대학원생이 교수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가로챘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초 : 공동연구에서 일어나는 저자 순위를 놓고 벌어지는 암투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1980년대에 쓰여진 ‘젊은 과학도에게 드리는 조언’이라는 책에도 나올 정도다. 이 책의 저자 피터 B. 메다워(Peter B. Medawar)는 논문의 저자 문제처럼 민감한 사안들은 논문 작성 전에 미리 합의를 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 사실 자연대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의대나 공대에는 아마 널렸을 거다. 연차가 낮은 대학원생들이 졸업해야 하는 대학원생들을 위해 희생하기도 하고, 교수가 예뻐하는 애들 이름을 앞에다 넣는 괴기스러운 일도 들어봤고, 심지어 교수가 미워하는 애 이름을 나중에 빼버리는 일도 있다.


리 : 그래서 누가 잘못했다는 건가(…)

초 : 남 교수라는 사람이 ‘아고라에 글을 올린 대학원생은 테크니션에 불과했다’는 말을 했다던데, 이런 권위적인 태도가 문제다. 테크니션, 즉 실험실에서 기예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이들에 대한 암묵적인 위계가 과학을 망친다. 과학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이 따위 문화가 없는데, 저딴 사고방식은 어디서 배워먹은 건지 모르겠다. 우리 실험실에선 테크니션일지라도 논문에 기여한 정도가 비슷하다고 생각되면 공저자로 들어간다. 테크니션은 논문에 이름을 안 넣는다고? 그런 얘기 여기 우리 실험실 와서 울 교수한테 해봐라. 맞아 뒈질 거다.


리 : 네이처의 무게감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말도 있다.

초 : 결국 네이처가 사람을 잡는 거지. 네이처 표지논문이잖나? 이거 한편이면 레벨이 달라지니까 양심이고 뭐고 없는 거다. 과학정신이 실종됐다는 게 이런 거지. 물론 그 사람들 개개인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다 자본주의의 피해자들이지. 그걸 모르는 게 안타까울 뿐. 통합진보당도 자기 내부단속을 제대로 안 하고 외부홍보만 하다가 무너지지 않았나? 과학계도 내부단속을 제대로 못 하면 한방에 훅~ 간다. 황우석 사태에서 도대체 배운 게 뭔지 모르겠다.


리 : 결국 당신도 과학사회학자들처럼 윤리를 강조한다?

초 : 윤리는 기본이잖아(…) 하지만 저런 일은 오히려 윤리적 각성이나 과학기술자 윤리강령 따위가 다 소용없다는 방증에 가깝다. 과학자들 좀 먹고 살만하게 해주는 게 논문조작 같은 사건 줄이는 데 더 도움이 될 거다. 뭘 좀 먹여야 안 싸우고 도둑질 안 할 거 아냐. 신발…